117년 만의 폭설, 무너진 농촌 …“눈 속에서 희망까지 얼어붙었다”
117년 만의 폭설, 무너진 농촌 …“눈 속에서 희망까지 얼어붙었다”
  • 권성환
  • 승인 2024.12.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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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농가가 피해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은 왼쪽부터 김대성 음성화훼센터장, 유석룡 한국화훼농협 조합장, 한상렬 농가, 한경표 음성화훼생산자협의회장.
한상렬 농가가 피해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은 왼쪽부터 김대성 음성화훼센터장, 유석룡 한국화훼농협 조합장, 한상렬 농가, 한경표 음성화훼생산자협의회장.

지난 11월 26일부터 28일까지 중부권을 강타한 기록적인 폭설은 농촌을 초토화시켰다. 초겨울에 내린 이례적인 폭설은 기상 관측 117년 만의 일이었다. 물기를 머금어 더 무거운 ‘습설’은 시설하우스와 인삼밭, 과수원 등을 무참히 짓눌렀다.

“하우스만 무너진 게 아닙니다. 희망도 다 내려앉았어요.”

충북 음성군 삼성면. 접목선인장을 재배하던 김현수 씨의 시설하우스는 폭설로 무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찢긴 비닐 사이로 얼어붙은 선인장들이 드러나 있었고, 한기가 가득 찬 하우스 안은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김 씨는 “하우스만 무너진 게 아닙니다. 희망도 다 내려앉았어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접목선인장은 국내 화훼 수출의 주력 품목으로, 특히 음성군은 국내 생산량의 80%를 책임지는 중심지다. 그러나 이번 폭설로 수출 화훼 농가 13곳 중 10곳은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며, 나머지 3곳도 2차 피해의 위협에 놓였다.
김 씨는 “밤새 내린 눈으로 전기가 끊기면서 온도가 영상 4도 이하로 떨어졌어요. 온실 속 선인장들은 모두 얼어버렸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가 재배한 선인장은 접목선인장의 핵심 재료인 ‘삼각주’로, 당장 재배를 시작하려고 해도 종자부터 구하기 힘든 품종이다. “이번 피해로 앞으로 3년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라는 김 씨의 말에 한숨만 길게 이어졌다.

단전이 된 농가를 돕고 있는 모습. 사진은 좌측부터 한경표 음성화훼생산자협의회장, 조재순 음성군 대소면장, 김홍영 음성군 대소부면장
단전이 된 농가를 돕고 있는 모습. 사진은 좌측부터 한경표 음성화훼생산자협의회장, 조재순 음성군 대소면장, 김홍영 음성군 대소부면장

휘어지고, 찢기고… 무책임한 현실이 더 답답해

김 씨의 하우스 앞에 쌓인 잔해 더미는 피해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철근이 휘어지고 비닐은 찢겨 나갔습니다. 전부 철거하고 다시 설치해야 하는데, 평당 50만 원은 들어가요. 천 평이라면 5억 원입니다. 여기에 작물 손실 비용도 평당 30만 원씩은 잡아야 합니다.” 총 8억 원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작물 폐기, 시설 철거 및 재설치 비용이 더해지며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같은 지역에서 선인장을 재배하는 최진석 씨도 절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도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다”는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겨울철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부부가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다. “눈 치우는 용역을 부르려니 한 명당 20만 원을 달라고 하더군요. 웃돈을 얹어가며 사람을 구해도 일을 하다 도망가버리는 상황입니다.”
최 씨는 무너진 잔해보다 무책임한 현실이 더 답답하다고 했다. “제설 삽 하나 사려 해도 가격이 두 배로 올랐습니다. 농자재 업체들이 이 상황을 기회로 폭리를 취하고 있어요.”

폭설로 무너진 김현수씨의 시설 하우스에서 얼어붙은 선인장들을 운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폭설로 무너진 김현수씨의 시설 하우스에서 얼어붙은 선인장들을 운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중부권 전역에서 이어진 재난 

충북 음성군의 사례는 이번 폭설로 초토화된 중부권 농촌의 단면일 뿐이다. 경기도 용인, 이천, 안성, 평택, 여주, 화성 등 남부 지역에서도 비슷한 피해가 속출했다.
화성 남양읍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차옥이 씨는 “4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올해 이상기후로 수확량이 줄었는데, 폭설로 수확을 끝내지 못하고 피해를 입으니 앞이 깜깜합니다.”
안성 보개면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이용수 씨는 폭설로 하우스가 무너지며 계약까지 위태로워졌다고 전했다. “출하를 보름 앞두고 하우스가 내려앉았습니다. 거래처에서 계약 위약금을 청구할까 걱정입니다.” 그는 폭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성 일죽면에서 인삼 농사를 짓는 신용우 씨는 눈앞의 현실을 차마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저었다. “하룻밤 사이에 70cm 눈이 쏟아졌습니다. 인삼밭 1만 평이 그냥 눈 속에 파묻혀 버렸어요. 아무것도 손쓸 수 없었습니다.” 신 씨는 얼어붙은 차광막을 가리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차광막을 걷어내야 하는데 얼어서 들리지도 않아요. 이대로 두면 차광막이 쓰러진 쪽은 땅이 녹으면서 인삼 뇌두 부분이 썩어버릴 겁니다. 2차 피해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토로했다. 

폭설로 무너지고 있는 인삼 밭
폭설로 무너지고 있는 인삼 밭

비현실적 재해보험 … 농민 이중고

“휘어진 파이프가 어디 멀쩡해 보입니까? 휘었으면 휜 거죠. 그런데 보험사 직원들은 이게 괜찮다며, 농민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충북 음성에서 화훼 농사를 짓는 한상렬 씨는 무너진 시설하우스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폭설로 그의 하우스는 골조가 휘어지고 비닐은 찢겼다. 
복구를 위해서는 골조 전체를 교체해야 하지만, 보험은 현실과 동떨어진 기준으로 농민들을 더 괴롭게 한다. “비닐이 찢어진 부위가 10m면 딱 그만큼만 보상해 준다니, 나머지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찢어진 부분만 고칠 수는 없으니 통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는데, 그 비용은 모두 우리가 떠안아야 하죠.”
이번 폭설은 농작물 재해보험의 실효성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다. 관엽식물, 다육식물, 선인장류 같은 화훼류는 아예 보험 가입 대상이 아니다. 보험사는 “표준 규격이 없고, 농촌진흥청에서 표준 경영비를 산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 같은 설명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반발한다.
음성 대소면에서 화훼 농사를 짓는 김항식 씨는 “9cm, 14cm 포트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고, 유통 가격도 500원, 800원 등으로 명확합니다. 기준 단가라도 정해주면 농가들이 그나마 숨통이 트일 텐데, 지금의 보험 제도는 농민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라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보험 체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인삼 농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년생 작물인 인삼은 매년 보험에 가입해야 하지만, 피해 시점이 보험 만기와 겹치면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농가들이 속출했다.
음성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한 농민은 “보험 만기 시점에 피해가 발생했는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농사자금을 갚으라는 재촉 우편은 보내면서 보험 만기 통보는 왜 안 했습니까?” 그는 현실에 맞는 장기 보험 상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6년 이상 가입할 수 있는 보험이 도입된다면, 다년생 작물 농가들이 안심하고 재배할 수 있을 겁니다.”

안성시 일죽면 이용우씨의 밭이 눈에 잠긴 모습
안성시 일죽면 이용우씨의 밭이 눈에 잠긴 모습

특별재난지역 선포 목소리 높아

유석룡 한국화훼농협 조합장은 “26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폭설로 인해 경기도와 충청도의 조합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며 “현재도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어 피해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농식품부와 행정안전부에 피해 복구와 지원을 위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건의했다고 밝혔다.
한경표 음성 화훼생산자협의회장도 “농민들이 혼자서는 복구가 불가능한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며 “신속한 특별재난지역 선포만이 농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농민들과 지역 협회들은 이번 폭설 피해를 국가적 재난으로 인정하고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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